프로젝트가 끝을 향해 간다. 후련함보다는, 엉킨 실타래를 풀지 못한 채 가위로 뚝 끊어내고 나오는 듯한 찝찝함이 남는 밤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늘 "누가 봐도 이게 정답인데, 대체 왜 반대하지?"라는 의문 속에 갇혀 있었다. 그리고 그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결국 '오만'이라는 괴물이 되어버린 과정을 기록해 둔다.
1. 합의라는 '비용', 그리고 악순환의 고리
나에게는 팀원들을 설득하고 합의하는 과정이 너무나 큰 '비용'으로 느껴졌다. 내 눈엔 너무나 당연히 고쳐야 할 문제들이었고, 더 나아지는 방향이 뻔히 보이는데, 그걸 하나하나 설명하고 동의를 구하는 과정이 소모적으로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공유'를 잘 안하게 됐다. "어차피 말하면 반대할 텐데, 결과물로 보여주면 납득하겠지." 그렇게 나는 독단적으로 작업을 진행했다.
내가 공유를 안 하고 일을 저지르니 → 팀원들은 불안해서 더 강하게 반대하고, 팀원들이 반대하니까 → 나는 설명하기 싫어서 더 공유를 안 하는. 지독한 악순환의 고리였다. 결국 팀원들이 내 아이디어에 태클을 걸었던 건, 아이디어가 별로여서가 아니라 "또 무슨 사고를 칠지 모른다"는 불신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2. '효율'을 핑계로 선을 넘다
사운드 시스템을 뜯어고쳤을 때도 그랬다. 믹서가 정리되지 않아 비효율적이었고, 마우스 크기 조절 기능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우리 게임의 감성을 해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팀원에게 묻지 않고 내 판단대로 기능을 없애고 갈아엎었다.
나는 그게 '팀을 위한 효율'이라고 믿었다. 불편한 걸 고쳤으니 아무 생각 없었다. 하지만 팀원 입장에서는 자신의 작업물이 예고 없이 난도질당한 황당한 사건이었다. "내가 옳다"는 확신에 취해, 동료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인 '질문'조차 생략해 버린 것이다.
3. '방어기제' 뒤에 숨은 포기 : 자기실현적 예언
픽셀 아트 작업 중 겪은 일련의 충돌 과정을 복기하다 보니, 내 안에서 작동했던 교묘한 '방어기제'를 발견하게 되었다.
시작은 '일반 안내 표지판'이었다. 나는 나름대로 깔끔하게 그렸다고 생각했지만, 팀원들은 가독성을 이유로 "더 반듯하고 명확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내 미감과는 달랐지만, 논쟁할 에너지가 없어 군말 없이 픽셀을 깎아 그들이 원하는 대로 수정해 주었다. 겉으로는 '수용'이었지만, 내면에는 "어차피 내 말은 이들에게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해버렸다.


문제는 그 불신이 '위험 지역 표지판' 작업에서 뒤틀린 방식으로 터져 나왔다는 점이다. 비밀스럽고 위험한 길목. 내 기획 의도상 그곳의 표지판은 당연히 낡고 부서져 있어야 했다. 하지만 작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두려움이 앞섰다. '이걸 공들여 그려가도, 또 가독성 운운하며 반대하겠지?'
여기서 나의 방어기제가 작동했다. 나는 팀원들을 설득할 수 있는 '적절히 낡은' 디자인을 고민하는 대신, 보란 듯이 훨씬 더 과하게 부서지고 삐딱한 결과물을 그려냈다. 그것은 최선의 결과물이 아니었다. "이래도 안 된다고 할 거지?"라고 묻기 위해, 거절당할 수밖에 없는 명분을 스스로 심어놓은 '시험용 결과물'이었다.
예상은 적중했다.

팀원들은 "이게 뭐냐", "가독성이 너무 떨어진다"며 난색을 보였다. 그 반응을 확인한 순간, 나는 역설적이게도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내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안목이 좁아서 내 작품이 거절당했다는 핑계가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거 봐, 역시 안 되잖아." 나는 그 명분을 방패 삼아 수정을 시도하는 대신 표지판을 삭제해 버렸다. 팀원들이 내 감성을 이해 못 한 게 아니었다. 반복되는 수정 요청에 상처받기 싫었던 내가, '어차피 안 될 거야'라는 상황을 미리 연출하고 도망쳐버린 것이다. 소통의 비용을 아끼기 위해 스스로 결과물을 망가뜨린 것, 그것이 내가 저지른 '방어'의 실체였다.
4. "폐기하라"는 말 앞에서
https://x.com/3BlanketStudio/status/2016425102792069612
X의 Three Blanket님(@3BlanketStudio)
A quick question regarding the in-game upgrade effects. (A)⬆️: I love the impact, but we worry it's distracting. (B)⬇️: Team prefers this for clarity. (Clean & Safe). Do you think A is "too much"? Or is it just right? #indiedev #gamedesign
x.com
업그레이드 피드백을 추가했을 때, 팀원들은 "쓸데없는 짓"이라며 폐기하라고 했다. 게임의 타격감과 재미를 위해 필수적인 요소라고 생각했는데, 팀원들은 그렇게 생각안했나보다. 그래서 팀원들한테 최대한 괜찮은척 운동하러갈래? 물어보고 체력단련실로 나가 같이 운동을 했다.
땀을 흘리며 머리를 식히다 보니, 문득 억울함 뒤에 숨은 내 과욕이 보였다. '내가 너무 내 취향대로만 세게 넣었나?'
나는 돌아와서 효과의 정도를 줄여 다시 구현했다. 나의 고집을 조금 꺾고 "이 정도면 어때?"라고 내밀었을 때, 그들은 의외로 별말 없이 받아주었다. 그게 내 수정안이 설득력이 있어서였는지, 아니면 혼자 아등바등하며 땀 흘리고 온 내가 불쌍해 보여서 적선하듯 허락해 준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내 것'이 무시당했다고 길길이 날뛰는 대신, 감정을 빼고 한 발짝 물러서니 의외로 타협의 공간이 열린다는 것을.
5. 신뢰가 없으면 '각자도생'은 불가능하다
팀이란 서로 엉겨 붙어서 뒹구는 게 아니라, 각자 맡은 바를 프로답게 완수하고 그것을 합쳤을 때 시너지가 나는 '개인플레이의 합'이 이상적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나도 그들에게 간섭하지 않으려 했고, 그들도 나를 믿고 맡겨주길 바랐다.
하지만 현실은 아니었다. 나는 그 상황이 너무나 답답했다. '아니, 그냥 좀 믿고 맡기면 안 되나? 왜 이렇게 사사건건 따져들지?'
하지만 냉정히 인정해야 한다. '간섭 없는 자유'는 탄탄한 '신뢰'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앞서 내가 독단적인 행동들로 신뢰를 다 까먹어버린 상태에서, 그들에게 나의 '개인플레이'는 '폭주'로 보였을 것이다. 그들은 나를 괴롭히고 싶어서가 아니라, 불안해서 나를 검열할 수밖에 없었던 건 아닐까. 결국 내가 원했던 '프로다운 존중'을 받지 못한 건, 내가 먼저 그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뼈아프게 다가온다.
마치며:
처음 크래프톤 정글 게임랩에 지원했을 때, 나의 1순위 목표는 코딩 실력이 아니라 '팀원들과 함께 게임의 재미를 찾아가는 과정'을 배우는 것이었다. 혼자서는 알 수 없는, 팀으로서의 시너지를 경험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니 씁쓸함이 앞선다. 나름대로 각자의 방식대로 잘 살아가던 사람들, 그들만의 속도로 평온하게 완주할 수 있었던 팀원들을 만난 건 나였고, 나의 지독한 기준과 조급함이 오히려 그들의 리듬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린 건 아닐까.
"더 재밌게 만들어보자", "이게 진짜 재미다"라고 소리 높였던 나의 열정이, 그들에겐 그저 평화로운 일상을 깨뜨리는 스트레스이자 '폭력'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