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주차부터 에픽 프로젝트를 함께할 팀원들이 확정되었습니다. 좋은 사람들과 한 팀이 되어 설레는 마음으로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나만 재밌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재미를 느낄 수 있는' PoC(Proof of Concept, 개념 증명)를 만들어야 나중에 출시했을 때 좋은 평가를 받고 게임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창작의 고통을 뼈저리게 느끼며 PoC 만들기에 돌입했습니다.
9주차: 첫 PoC 'Space Hauler'와 뼈아픈 교훈
제가 처음 야심 차게 준비한 PoC는 'Space Hauler'라는 우주 배송 게임이었습니다. 당시 발표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Space Hauler 발표 요약]
- PoC 후보: 저희 팀은 총 4개(Space Hauler, 2D 도둑 게임, The Fog, 몬스터 버프 게임)의 PoC를 만들었습니다.
- 선택 이유: 'Space Hauler'를 플레이했을 때, 팀원 모두가 물리 환경에서 우주선을 조작하는 '맛'과 배달의 '성취감'을 느껴 이 PoC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 핵심 재미: 물리 법칙의 영향을 받는 우주선 자원을 관리하며, 택배 상자를 손상 없이 배달하는 긴장감.

[플레이 테스트(플테) 여정]
- 1차 플테: 물리기반 시뮬레이션 장르를 싫어하지 않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테스트했지만, 호불호가 명확히 갈렸습니다.
- 가설 1: "불합리함을 없애면 재밌어할까?"
- 개선: 행성 중력 범위 시각화, 미니맵 UI 추가, 조작감 소폭 개선.
- 2차 플테 결과: 1차보다 '이착륙 시 긴장감'과 '배달 성취감' 점수가 상승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조작이 어렵고 전반적인 순수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피드백이 많았습니다.
- 가설 2: "우주 컨셉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이 하면 다르지 않을까?"
- 검증: itch.io와 여러 SNS에 홍보. (17명 플레이)
- 결과: 댓글 내용은 1, 2차 플테 내용과 비슷했습니다. 조작이 너무 어려워 핵심 재미를 느끼기 힘들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 가설 3: "조작감이 좋아지면 핵심 재미를 더 많은 사람이 즐길 수 있을 것이다."
- 개선: 조작감을 대폭 쉽게 수정.
- 3차 플테 결과: 조작감이 구리다는 의견은 사라졌지만, 오히려 핵심 지표 점수가 하락했습니다.
- 독창성: 3.5점 → 3.0점 (쉬워진 탓에 하락)
- 이착륙 긴장감: 4.125점 → 3.6점
- 배달 성취감: 3.75점 → 3.2점 (배달이 쉬워져 노력 대비 성취감 하락)
[발표 결론과 현실]
저희는 발표에서 "3회차 점수는 떨어졌지만, 1회차에서 2회차 플테에서는 점수가 상승했으므로 가능성을 보고 Space Hauler를 최종 선택한다"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발표가 끝나자 코치님과 다른 분들이 모두 웃으셨습니다. "왜 점수가 떨어졌는데 이걸 고르냐"며 다시 하라고 하셨죠.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이상한 결론이었습니다. 아마도 팀원 모두가 첫 PoC에 애정이 있었고, 저는 이게 먹힐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있었나 봅니다. 돌이켜보니 정말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0주차: 새로운 PoC 탐색과 '심리적 안정감'에 대한 고찰
Space Hauler를 폐기하고 10주차에는 새로운 PoC 개발을 이어갔습니다.
1. 얼음바닥 플랫포머
- 핵심 경험: 얼음 바닥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관성을 이겨내고 성취감을 얻는 것.
- 상세: 캐릭터를 떨어지지 않게 조작하며, 빙판 위를 질주하는 관성 속도 벡터를 점프 중 정밀 조작으로 상쇄하여, 불가능해 보이는 착륙 지점에 도달하는 극한의 성취감을 목표로 했습니다.
- 결과: 더 생각해 볼 여지는 있었지만, 이 컨셉을 더 발전시켜서 재미있는 게임으로 만들기 어려울 것 같다는 판단에 폐기했습니다.
2. 한글 크래프트
- 내용: 보통 생존 게임은 흙을 캐서 관련 아이템을 만들지만, 이 게임은 재료를 캐서 분해한 '한글 자모'를 조합해 아이템을 만드는 방식이었습니다. 독창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결과: 팀원들은 재밌다고 해서 괜찮은 줄 알았는데, 막상 플테를 시켜보니 재미가 전혀 없었습니다.
이때 구글의 '아리스토텔레스 프로젝트'가 생각났습니다.
[구글의 아리스토텔레스 프로젝트 (Project Aristotle) 심화]
구글이 '효과적인 팀'의 비결을 밝히기 위해 2년간 180개 이상의 팀을 분석한 대규모 연구입니다. 연구 결과, 팀의 성과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누가 팀에 있는지(개인의 능력치 합)'가 아니라 '팀원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였습니다.
구글은 5가지 핵심 요소를 발견했으며, 그 중요도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 심리적 안정감 (Psychological Safety): 가장 중요합니다. 팀 내에서 내 생각, 의견, 질문, 실수를 드러내도 처벌받거나 창피를 당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보장되어야 팀원들이 위험을 감수하고 솔직한 피드백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 상호 의존성 (Dependability): 팀원들이 서로의 작업을 제시간에 높은 품질로 완료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 구조와 명확성 (Structure & Clarity): 팀원 각자의 역할, 계획, 목표가 명확하게 공유되는 것입니다.
- 일의 의미 (Meaning): 자신이 하는 일이 팀원 개개인에게 개인적으로 중요하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 일의 영향력 (Impact): 자신의 작업이 중요하며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고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한글 크래프트'의 경우, 이 중 1번인 심리적 안정감이 부족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팀원들이 아직 서로 심리적 안정감이 부족해 제 아이디어에 대해 솔직하게 '재미없다'고 말하기 어려웠을 수 있습니다. 팀이 더 편안하게 자신의 의견을 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더 정진해야겠습니다.
현재 구상 및 개발 중인 PoC
그래서 현재는 두 가지 새로운 PoC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1. 몸을 깎아서 공격하는 게임

- 핵심 재미:
- 자신의 몸 일부를 총알로 발사해 적을 공격하되, 발사할수록 몸이 작아져 약해지는 리스크를 감수하는 긴장감
- 적에게 닿으면 몸이 터져 조각들이 흩어지므로, 위치와 거리 판단을 실수하면 즉사할 수 있다는 전투의 압박감
- 흩어진 몸조각을 회수하고 적을 처치해 떨어진 음식을 먹으며, 위험을 뚫고 점점 거대해지는 성장의 쾌감
- 상태: 현재 준비 중이며, 곧 플테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2. 진짜 폐지 줍는 게임 (3D)
- 컨셉: 리어카로 시작해 마을을 돌아다니며 폐지를 줍고, 무게를 재서 파는 3D 시뮬레이션 게임입니다.
- 물리/조작: 리어카의 무게 중심을 잘 잡아야 하고, 박스를 잘 묶어야 떨어지지 않습니다. 오르막길(부자 동네)도 있습니다.
- 수집/발견: 폐지 외에도 운 좋으면 신기한 요소나 무거운 '철' 등을 주울 수 있습니다.
- 성장/업그레이드: 마을 상점에서 리어카 크기, 바퀴, 손잡이 등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습니다. 차고가 있는 집도 구매 가능하며, 나중에는 람보르기니를 끌 수도 있습니다.
- 시뮬레이션: 집에서 쉬거나, 손주/고양이를 위해 보일러를 트는 등의 요소가 있습니다. 손주가 자라는 것을 보는 재미도 있습니다. 가끔 꼬맹이들이 도와주기도 합니다. (매일 아침 짐은 초기화됩니다.)
- 핵심 재미: 리어카를 끌고 다니면서 팔 수 있는 것들을 모아 무게 중심이 잘 맞게 배치하고, 무너지지 않게 배달하는 것입니다.
9주차와 10주차는 수많은 PoC를 만들고, 테스트하고, 실패하는 과정의 연속이었습니다. 창작의 어려움과 팀워크의 중요성을 동시에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